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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사 [太古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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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사 [太古寺]

대둔산의 해발고도 878m 마천대 능선에 있는 사찰로,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원효가 12승지의 하나로 꼽은 명당으로, 한때는 대웅전만 72칸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다. 인도산(印度産) 향근목으로 만든 불상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최근에 다시 지은 대웅전, 무량수전, 관음전 등의 여러 건물이 있으며, 이 태고사를 끼고 낙조대에 오르면 대둔산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금강산 마하연사와 동렬의 명찰로 서산대사의 법손 진묵대사가 오랫동안 수도하다 입적하였으며, 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하였다.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서 도를 닦으며 쓴 석문이 절 앞 암벽에 아직도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고사 [太古寺] (두산백과)

진산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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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피의 증거자가 태어난 계기가 된 진산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1791년 신해박해의 원인인 진산사건은 그 해 5월 모친상을 당한 윤지충(바오로)이 ‘교회 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외종 사촌인 권상연(야고 보)과 함께 유교식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당대 사회에 패륜으로 받아들여졌고 체포령이 떨 어지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 관아에 나아가 자수함으로써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당한 사건이다.참수 당하기 전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천주를 큰 부모 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 다.” 특히 윤지충은 “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 다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진산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의 두 순교 자의 고귀한 정신을 기억하기 위한 곳이다.

진산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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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 향교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1397~1398년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 진산면 읍내리(현 진산중학교))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55년(영조 31)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총면적은 3266㎡이며, 대성전(25평)·명륜당(20평)·전교실(2평)·고직실(4평)로 구성되며, 원래의 동묘와 서묘는 헐려 없어졌다.

1887년과 1904년 대성전과 명륜당을, 1965년에 대성전을 다시 중수하였고, 1968년에 전교실을 신축하였다. 이후 노후된 대성전을 1982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정면 3칸의 2층으로, 담장 밖에 있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분합문을 달았고, 안뜰에 있는 쪽마루는 이후에 가설한 것이다.

중국의 5성(공자·안영·증자·자사·맹자) 2현(정호·주자)과 국내 18현(설총·최치원·안유·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을 배향하며, 해마다 2월과 8월의 초정일에 제사지낸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진산향교 [珍山鄕校] (두산백과)

이치 대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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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는 순우리말 '배티재'의 한자 이름이다. 이 배티재는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중요한 곳이었다. 임진년 7월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왜군이 군량미의 현지 보급을 위해 이 배티재를 넘어 호남평야로 진출하려 하였다. 이때 왜장 고바야가와가는 2만 병력을 이끌고 재를 넘으려 했다. 한편, 이보다 앞서 권율장군은 동복현감 황진과 1,5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 재를 지켜 왜군의 호남진출을 막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군은 수의 우세함과 승승장구의 힘을 믿고 단숨에 이 재를 넘으려고 공격했지만, 장군은 전병력을 독려, 결사전을 벌여서 적을 섬멸하여 승리를 거두니, 이를 일컬어 이치대첩이라 하고, 이후 왜군의호남 진출 전략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1866년 금성면(錦城面) 상가리(上佳里)에 이치대첩비와 대첩사 (大捷祠)를 세웠으나 1944년 6월 일제가 항일유적 말살정책으로 폭파하여 그 파편이 진산면 사무소에 보관되었다. 1963년 대첩에 참여한 후손과 지역 유지가 지금의 장소에비석을 건립하였다. 1991년부터 성역화계획이 수립되어 사당·비각 및 안내판 이축, 내삼문·외삼문·담장을 건립하였다.장군의 묘소(경기기념물 제2호)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長興面) 석현리(石峴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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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관군·의병으로 3만 왜적을 1593년 2월 12일부터 수일간의 격전 끝에 승리의 깃발을 올린 권율장군이 이끈 행주대첩 등, 왜란 발발 후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왜적을 대파시키고 승전의 깃발을 올린 3대 큰 싸움을 일컫는 말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한산대첩과 진주대첩은 호남을 장악하고자 했던 왜적의 침략에 맞서 싸워 조선의 곡창을 지켜냈던 큰 싸움으로도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호남의 곡창을 지킨 3대 대첩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사건으로 이치대첩이 더해진다. 특히 왜적들이 부산성 함락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승전을 거듭하며 개전 한 달도 안돼서 서울마저 합락 시키고 평양으로 질주하는 와중의 대첩은 왜적의 사기를 꺽어 놓기에 충분했다. 한산대첩과 이치대첩이 그 사건. 남해를 굳건히 지켜냈던 해전인 한산대첩이 있던 날 금산에서 벌어진 이치대첩은 군량미의 현지보급을 꾀하고자 했던 왜적이 조선의 곡창 호남을 공략하고자 전주로 진군하는 것을 막아선 사건으로 1,500의 관군·의병만으로 2만의 왜적을 격퇴시킨 사건이다.

임진년 7월 8일 적장 고바야카와 다카가케는 2만 병력을 이끌고 배티재를 넘으려 했다.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왜적이 기세등등하여 호남평야로 진출을 시도했던 것. 군량미 현지보급처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왜적들의 동태를 미리부터 파악하고 있던 권율장군은 동복현감 황진과 1,500여명의 관군·의병을 데리고 그들이 넘고자 하는 고개에서 목책을 세우고 화살과 돌 등 무기를 확보하며 진을 치고 기다렸다.

마침내 벌어진 싸움. 7월 8일 아침의 배티재는 피로 물들고 있었다. 협곡을 이루는 험한 지형지세를 이용한 권율장군의 전술전략은 적중했지만 중과부적의 힘겨운 싸움이 되리라 예상했던 만큼 전투는 치열했다. 이른 아침부터 해 질 무렵까지 전투는 계속 되었던 것. 1,500 전 병력을 독려하며 결사전을 벌인 끝에 적을 물리치고 대첩을 올리니 이 전투가 조선의 곡창을 지킨 이치대첩이다.

1592년 7월, 승전의 함성이 울렸던 배티재. 고개의 이름 유래는 고개 일대에 배나무가 많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을 한자로 하여 ‘배나무 이’, ‘고개 치’를 써서 이치(梨峙).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대첩을 이루었으니 ‘이치대첩지’가 된다.

대둔산 운주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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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 운주계곡